2009/11/22 18:49 Hobby/Ani/Movie/Music


이야기란 있음직한 내용을 풀어나갈 때 더욱 그럴싸하다고 느끼고,
심지어 그것이 진실일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증명된 진실만이 사실이 되어버리는 현실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증명되지 않은, 이른바 상식으로 불가능성이 있어보인다면 그저 꾸며낸 이야기로
생각해버리는 현실.


현실과 환상, 거짓과 진실, 진실과 사실.

진실임에도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해버리는 현실 속에서,
내가 무시해버린 진실은 없을까 되돌이켜 보는 기회를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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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은풍
2009/11/13 17:42 Hobby/Ani/Movie/Music

용서는 누가 하는 것인가.


영화 중 남편의 죽음에서는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그 공간적 장소를 벗어나 밀양으로 오는 신애지만,

밀양에서는 자식의 죽음을 겪게되고 그 상처를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려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신앙의 힘으로 그 죄인을 용서하려고까지 한다.

하지만 자식을 죽인 살인자는 오히려 교도소 안에서 신앙을 갖게되어 이미 죄를 용서받았다고 한다.

과연 용서는 누가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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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은풍
2009/11/08 22:46 Hobby/Ani/Movie/Music

영화 속 마츠코는 어린 시절부터 병약한 동생 때문에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적게 받았다고 여기며 그러한 관심을 받기위해 다소 코믹스러우며 엽기적인 표정으로 아버지의 관심을 끈다.
그러한 행동은 사랑과 관심을 받아 행복함을 느끼기 위함이 제일이라는 듯한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사랑을 받기 위해, 혼자인 것보다 낫기 때문에, 현실이 아플지라도 헌신하고, 되돌아 오는 것인 배신일지라도 감내하고 또다른 행복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그녀의 일생이었지만, 결국 인생의 마지막은 어떠했는가.

그 마지막은 과연 행복을 얻기 위한 일생의 행위들이 가져온 결과일 것인가?
설령 그러한 과정을 지나오면서 '행복을 위해서' 했던 행동들이 과연 '혐오'스러운 것일까.


영화 중 '인간의 가치라는 것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았느냐가 아닌,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줬느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행복도 마찬가지로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을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겠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인간의 가치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 후 인간은 이러한 정의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가치다 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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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은풍
2009/10/26 00:50 Hobby/Ani/Movie/Music

가출한 어머니, 술에 찌들어 있는 아버지, 반항적인 모습의 동생.
그리고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길 원하는 주인공.

가정을 그린다면 그릴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것을 갖추어 놓은 듯한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도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성 정체성을 이유로 인한 성 전환의 모습에 대하여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불화가 가득한 가정환경이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함 없이 성정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주인공의 시각 외에서는 유산자와 무산자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무산자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주인공에게서 계속적으로 보여지는 '붉은색'은
여성성을 보여주는 색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씨름의 샅바를 통하여 남성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색이 섞여서 보라색이 되어 모호해져버린 색상의 샅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볍게 본 영화이지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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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은풍
2009/10/05 23:13 Hobby/Ani/Movie/Music


시간의 비가역성(非可逆性)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이 야기된 어떤 한 시점으로 되돌아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을 모면하고 원하는 상황이 되게끔 시간을 바꾸기를 원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작 기술의 진보이든 인간을 초월한 능력이든간에 과거이든 미래이든 시간을 뛰어넘어 바꿀 수 있다면,
자신의 현재가 항상 원하는 그대로일 것인가.

크게 보자면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가?" 라는 질문과 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결정되어 있는가? 변화할 수 있는가? 결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주제이기는 하다.


제로섬(zerosum)

성적에서 남보다 나은 점수를 받기 위하여 정당하지 않은 행동을 한다면, 분명 그로 인하여 손해보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아는 사람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 행동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고, 원치않는 시작을 만들기도 하듯이

한 사람이 시간의 이동을 통하여 원하는 바를 얻게되면, 어떤 누군가는 그로 인하여 손해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감상문은 상당히 부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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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은풍
2009/09/14 00:54 Hobby/Ani/Movie/Music

붙여지지 않는 편지

도라는 교사였다가 은퇴하여 혼자 사는 노처녀로, 그녀는 리오의 중앙역 한편에서 편지대행을 한다. 문맹이 많은 저개발 사회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편지를 써주고 대신 우송해주겠다고 돈을 받는 도라는 자신이 대신 써준 편지를 한통도 우송하지 않고 모두다 쓰레기통에 버린다. 애달픈 삶을 살아가는 불쌍한 이들의 무지를 이용한 사기행각이므로 그 죗값은 크다.

한 어머니가 남자 아이를 데리고 편지 대행을 부탁한다. 먼 곳으로 가버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모자가 편지를 부탁하고 역을 나와 길을 건너던 중 건널목 가운데에서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팽이를 떨어뜨린다. 아이가 팽이를 줍는 사이에 신호등이 바뀌고, 마침 달려오던 버스에 어머니가 깔려 죽는다. 갈 곳이 없어진 아이는 중앙역을 맴돈다. 도라는 그 아이를 자기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는 인신매매업자들에게 아이를 팔아넘긴다. 그러나 밤새 죄책감으로 잠을 설친 도라는 아이를 다시 빼내어 도주한다. 아이를 아버지에게 데려가기 위해 긴 여정이 시작된다.


인간성의 회복

리오라는 도시를 떠나 시골길을 달려간다. 거짓과 물질만능주의가 판치는 도시를 떠나 달리는 시골길은 신의와 배려가 가득하다. 중간에 만난 트럭 운전사가 이러한 기능을 보여준다. 그리고 도라와 아이 사이에 대화가 존재한다. 그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매개 점은 아버지. 도라가 아버지를 부정하는 데에 비해 아이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희망을 안고 있음이 다를 뿐이다. 결국 그들이 도착한 땅 끝 마을, 아버지가 정착한 곳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는 그들 모자를 찾아 떠났고, 아이의 두 형만 아버지가 하던 목수 일을 이어받아 하고 있다. 도라는 이 아이에게는 이들 형, 가족이 필요함을 느끼고 아이를 맡긴 채 그들을 떠나게 된다.

영화는 리오를 떠났을 때의 도라와 마지막에 버스를 타고 떠나가는 도라가 아버지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통하여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아이에게는 형이 팽이를 깎아 만들어 준다. 어머니를 잃게 했던 그 팽이와 같은 모양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형이 만들어준 팽이가 연결되고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존재하는 가족이 있음을 보여준다. 여정을 겪어가면서 도라는 점점 모성애를 회복하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간다. 마찬가지로 아이도 도라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면서 부정적으로 새겨졌던 아버지의 형상을 되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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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은풍
2009/09/07 01:40 Hobby/Ani/Movie/Music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 실천이 낫다'

도시에서 부모의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 마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나올 법한 행동을 보이는 아이가, 각박한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는 시골에서의 바뀐 생활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 환경에 적응하게 된다.

물론 이 적응에 다소간의 시간이 걸리게 된 점은 외할머니의 언어적 소통의 부재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적 소통의 부재가 있음으로써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알 수 있게 된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 실천이 낫다'와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한 마디의 말보다 행동 하나 하나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으니, 이를 깨닫는 순간의 반성과 감화는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

생활고 때문에 자식과 떨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맡아 줄 것 같은 어머니. 자식이 무작정 손자를 데려와서 맡아달라 하지만 그 어떤 조건 없이 맡아 줄 수 있는 어머니. 이 둘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희생을 매개점으로 하여 연결된다. 그러므로 엔딩 크래딧의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표현은 그러한 부모의 희생에 대한 감사를 담고 있다고 본다.


영화 전반에 걸쳐 자식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과 그 사랑을 몸으로 느끼고 감화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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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은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