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간이라 포스팅양이 매우 늘었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프랑스인이니깐 "Je pense, donc je suis"라고 했을테고 라틴어로는 "Cogito, ergo sum"이 된다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인식에 대해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을 하며 의심할 수 없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연구.

주위에 있는 다른 모든 사물은 의심할 수 있고 의심의 여지가 있어도 이와 같은 의심을 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즉 '생각하고 있는 순간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의심할 수 없다'라는 대명제를 발견하였다나...


사유하는 나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유하지 않는 나의 존재는 부정할 수 있는 것인가.


지난 학기 '삶과 철학'이라는 교양 수업 때 주제였던 '나는 존재하는가?' 시간에 '나는 생각하니깐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었다면 교수님은 "니가 데카르트냐?"라고 딴지(?) 걸었을 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정의'보다는 나와 주변의 '관계'속에서 나에 대한 존재의 이유(Raison D'etre)를 찾았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절단나 있는 관계를 보자면, 
가식적일 수 밖에 없는 관계를 보자면,
진실 어린 마음의 관계를 찾기 힘들다면,
나는 그러한 표면적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누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면서 관계를 만들어 유지하고 어쩌구 하던 얘기도 얼핏 생각나지만,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완전한 '나'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이어서 주저리 주저리를 시작해본다면,


다른 얘기지만,
나와 맺어진 수많은 인연의 끈들이 멀어지고 멀어진다고 해도
가늘고 가느다란 끈으로 남아있다면,
그 끈의 재질과 농도와 길이에 상관없이
'인연'이라는 소중함 속에서 소중하게 다루어졌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항상 앞으로 밝게 나가고자 하는 '나'이지만,
항상 뒤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하는 '나'이지만,
항상 갈팡질팡하며 결국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릴 듯한 '나'이지만,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가 잘됐으면 좋겠다. 라는 나약한 마음을 품어도 보지만,

결국 마음속의 외침과 함께
'나'는 '나'를 어디에 두어야할 것인지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이렇게 답 안나오는 물음을 나에게 한번 다시 던지므로 나는 숙성될 수 있는 것인가.

머릿속에 공허하게 흘러다니는 잡생각들을 종이 위에 탄소덩어리나 잉크입자들로 표현하진 않지만,
머리의 허황된 이미지를 한글이라는 문자를 통하여 나만의 작은 공간에 오늘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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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jgoon.tistory.com jgoon 2007.12.08 06:26 신고

    존재의 이유를 찾는 노력은 멈추어서는 안되겠지만
    그 답은 자기 최면과도 같은 것 같아.
    난 이래서 존재한다. 때문에 어떤 일을 해야겠다.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또 특별한 누군가를 위해..

    그런 추측 속에서도 진심은 통하기 마련일거고..
    문제는 그 방법이 적절해서 실제 도움이 되었는지..
    정말 그 목적자체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다른 것을 얻기 위한 방편이 되진 않았는지 하는 것들이 아닐까 싶네.

    그리고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라는 것은
    결코 혼자서는 정립할 수 없기 때문에
    만일 그 사람과 유대관계를 지속하지 못한 체로 지낸다면
    질문은 계속될 수 밖에 없겠지.

    아무튼 요점은 “주고 받아야만” 그런 방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주고 싶은 존재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두고 싶은 자리에 둔 체로 그냥 간직하는 수밖에 없지않을까 싶다.

    • Favicon of https://eunpoong.com 은풍 2007.12.08 16:56 신고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한 노력이야
      살면서 평생 해가야겠지,
      그것이 멈춰진다면 해탈한 경지이거나 삶을 삶 답게 살지 못하는 경우랄까.

      '나'에 대한 정의 또한,
      절대적인 정의를 할 수 없기에, 다른이와의 피드백 속에서 찾으면 좋겠지만,
      그 피드백이 힘들경우에 자기번민이라는 무한루프를 돌고 있는 듯 하다네~

  2. Favicon of https://soulco.tistory.com 지성의 전당 2019.02.08 16:50 신고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데카르트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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